서론부터 갑작스레 SF를 부정하는 것 같지만,

최근의 SF는 옛날의 그것과 많이 다른 듯 합니다.

제가 중학교 다닐때의 SF만 하더라도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킹... 같이 재미없는 영국식 개그가 들어가 있거나, 빡빡한 설정에 캐릭터 대화는 도데체 언제 나오나 싶을 정도의 하드 SF밖에 없었는데

예전에 읽었던 단편집도 그렇고 이 책도 그렇고 SF는 하나의 배경역할밖에 하지 않습니다.

요컨데 미래이야기, 로봇이야기, 전뇌이야기등, SF에서 흔히 볼법한 소재로 현대사회의 불편한 세상을 얘기하더군요.

어찌보면 이게 SF가 살아남는 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만.

의외로 시간여행에 관한 테마가 많았습니다. 시간여행하면 역시 패러독스죠. 내가 과거로 가서 역사를 바꾸면 미래는 어떻게 될것인가. 백투더퓨처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수많은 가설들이 오갔지만 가장 대세로 떠오르는건 드래곤볼처럼 평행세계론이 두드러지더군요. 단편집에서는 또다른 가설도 나왔지만요.

많은 작품들 중에 인상깊은 작품 몇개를 들자면

백중, 달에게는 의지가 없다, 관광지에서 를 꼽을 수 있겠습니다.

'백중'은 미래세계에서 좀 더 효과적인 치안활동을 위해 형사들의 머리에 AI를 심는 내용입니다. 개인적으로 형사물, 특히 Buddy물을 좋아하는데 두 Buddy 가 투닥투닥하면서도 하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뛴다는 점은 언제나 남자들을 뜨겁게 만들죠. 미래세계에서 범인을 잡는 형사의 모습과 이를 도와주는 인공지능 서낭 - 귀신이 사어死語가 될정도로 먼 미래이므로 매우 특별하다 - 은 자칫 가벼울 것 같은 이야기를 진즉하게 이끌어 나갑니다. 적절하게 완급을 조절하고 가벼운 여운을 남기는 엔딩까지, 꼭 읽어보길 권합니다.

'달에게는 의지가 없다'는 달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이야기입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SF임에도 불구하고 SF의 탈을 쓴, 현대 노동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죽도록 일하고 팔까지 잃었지만 회사에서도, 사회에서도 그를 도와주는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심지어 공무원 자제와의 싸움에 말려들어 억울한 누명까지 쓰게 됩니다. 주인공은 그저 계약기간동안 일해서 받는 조그마한 땅덩이에서 집짓고 사는게 소원이지만 현실은 그를 더더욱 옥죄여옵니다. 지금도 그런데 (배경이 먼 미래인) 소설에서도 이러니 참으로 갑갑하네요.

'관광지에서'는 시간여행이 테마지만 그 내용은 종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기존의 시간여행물이 말하는 타임패러독스를 이 작품은 모두가 아닌 나에 한정해서 풀이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과거의 자신과 이어져 있고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끈을 찾아가면 과거로 갈 수 있다고. 그리고 그 과거는 '자신'에게 관련된 과거이기 때문에 과거를 바꾼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에게만 영향이 미친다고 말합니다. 주인공은 어머니와 함께 과거 싯다르타가 열반에 든 장소를 찾습니다. 어머니가 불교이거든요. 결국 열반에 빠지는 싯다르타를 보고 현재로 돌아온 어머니는 해탈을 합니다. 더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은거죠. 타임패러독스 설정은 조금 생각해보면 결국 불교의 윤회사상과 같습니다. SF와 종교의 만남은 비록 머리에는 전극을 꽂고 모든 업무는 기계가 대신할지언정 영혼만큼은 사람이 가진 유일무이한 존재임을 다시한번 증명해줍니다.


단편집은 정말 취향이 갈리는 책입니다. 모든 이야기를 좋아할 순 없을뿐더러 모든 이야기가 취향에 맞지 않을수도 있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흡이 짧은 단편집은 오히려 장편보다 긴 여운을 남깁니다. 이른바 열린 결말이라고도 하죠. 자기전 한편씩 읽어서 꿈속에서 다시한번 이야기를 되새겨보는건 어떨까요.
Posted by Yria

댓글을 달아 주세요